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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759년(영조35)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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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1759년(영조35)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즉위 후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형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작성지화(作成之化)'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우문지치(右文之治)'의 명분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춰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 있게 장려해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갔다.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정조대의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됨) 또한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가 융릉으로 올렸고, 용주사를 세워 원찰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완수하였다.

옛 수원 관아가 있던 화산(현 화성시)에 융릉을 조성하면서 대신 팔달산 기슭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어머니의 회갑연을 화성 행궁에서 열었다. 권신(權臣)들의 뿌리가 강고한 서울에서 벗어나 신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적 구상을 가진것이었다.

왕의 말을 ‘교(敎)주 02)’로 표현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왕은 통치자일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해 모범을 보여 큰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였다.
조선이 성리학이념을 채택하고 ‘우문정치(右文政治)’로 표현되는 문화정치를 표방한 지 400년만에 명실 부합한 전형적인 학자군주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융릉

조선 추존왕 장종(장조)와 비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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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추존왕 장종(장조)와 비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의 능.

개설

장종(莊宗)은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고,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莊祖)가 되었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승하하자, 양주 배봉산에 '수은묘(垂恩廟)'를 조성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1776년 즉위한 직후 부친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하고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했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수원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899년(고종 36)에는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고, 현륭원을 융릉(隆陵)으로 격상하였다.
같은 해에 다시 묘호를 장종에서 장조로 바꾸고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라 하였다.
[고종실록 36년 9월 1일] [고종실록 36년 12월 7일].

현경왕후는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1744년(영조 20)에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 사후에 영조에 의해 혜빈(惠賓)에 봉해졌고, 정조가 즉위한 뒤 혜경궁(惠慶宮)이 되었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여 현륭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1899년(광무 3)에 장헌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헌경왕후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다시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헌경의황후로 되었다.
융릉은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70년에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능인 건릉(健陵)과 더불어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상황

현륭원을 조성할 때, 이전 영우원의 석물이 상태가 좋지 않아 이를 옮겨 오지 않고 새로 제작하였다.
현륭원은 비록 세자의 묘에 해당하는 원(園)이었지만, 석물의 제도와 격식은 왕릉에 버금갈 정도였다.
봉분에는 효종의 영릉 이후 폐지했던 병풍석을 두르고 모란 무늬를 새겼으며, 연꽃 봉오리 모양의 인석(引石)을 설치했다.
또한 원에는 설치하지 않은 무인석도 배치하였다.

혜경궁을 부정할 때 총책임자는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맡았다.
혜경궁을 현륭원에 합부하는 것은 정조가 현륭원 조성 당시에 정한바였으므로, 따로 후보지를 거론하지 않고 현륭원을 봉심하는 것으로 그쳤다.
또한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까닭에 석물을 크게 추가하지 않고, 병풍석 일곱칸을 새로 만들고 지석과 표석만을 제작하였다.

변천

고종은 현륭원을 융릉으로 추숭하고, 이후 친히 음기(陰記)를 써서 표석을 고쳐세웠다[고종실록 41년 5월 25일]

관련 사항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에 읍치가 있는 화산 아래로 옮겨 모시면서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였다[정조실록 13년 7월 15일].
그리고 현륭원을 조성한 뒤 관방(關防)으로서 더욱 중해졌다 하여, 1793년(정조 17) 수원부를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했으며 화성을 축조하였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참고문헌
『사도세자묘소도감의궤(思悼世子墓所都監儀軌)』
『헌경혜빈현륭원원소도감의궤(獻慶惠嬪顯隆園園所都監儀軌)』
『현륭원원소도감의궤(顯隆園園所都監儀軌)』

현륭원 천원

천장은 풍수지리를 믿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집안 또는 왕실에서 무덤을 쓴 이후 수년 혹은 십 수 년에 걸쳐
그 집안 또는 왕실에 우환이 생기면 그 원인을 무덤을 잘못 쓴 탓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럴 경우 우환이 생기지 않을 만한 장소를 다시 골라서 새로이 무덤을 옮겨 조성하게 되는데,
이때 풍수지리 이론과 들어맞는 곳을 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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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륭원 천원

천장은 풍수지리를 믿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집안 또는 왕실에서 무덤을 쓴 이후 수년 혹은 십 수 년에 걸쳐 그 집안 또는 왕실에 우환이 생기면 그 원인을 무덤을 잘못 쓴 탓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환이 생기지 않을 만한 장소를 다시 골라서 새로이 무덤을 옮겨 조성하게 되는데, 이때 풍수지리 이론과 들어맞는 곳을 선정한다.

음택 풍수지리 이론에 비추어 보면, 한 집안의 미래는 음택의 장소와 환경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천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유교사회에서 제사를 지낼 후사가 끊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는 제사를 숭봉한 유교 사회이면서 풍수지리가 중요 문화 콘텐츠로 기능했던 사회이니만큼 왕실이나 집안의 전도를 걱정해서 천장을 실행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 최초의 이장기록은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를 천장한 『태조실록』의 일이다.
이후 태종대에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분묘를 천장하였고, 덕릉(德陵), 안릉(安陵)을 천장하기 위해 조회를 폐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릉(寧陵)으로의 천장, 즉 예종 때 세종의 능묘를 헌릉(獻陵)의 서쪽에서 경기도의 영릉으로 천장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천장사례이다.
세종대왕의 원래 능묘는 당시의 대소 관료와 학자들의 현장 답사 및 다양한 풍수지리서의 내용에 비추어서 조성되었지만, 능을 조성한 지 19년 동안 불미스러운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세종을 이어 등극한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종기로 죽고, 단종은 재위 3년만에 사약을 받았으며, 세조는 재위 13년 만에 지병으로 죽게 되자 예종 때 세종대왕의 능묘를 이장하려는 논의가 일어나게 된다.
1469년(예종 1)에 세종을 여주로 옮겨 모시려고 광중을 파니, 19년이 지났으나 시신은 물론 삼베 옷 하나 썩지 않았다고 한다.
몇 차례의 천장 논의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영릉의 형세에 대한 토론도 있었지만 결국 그대로 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영우원(永祐園)에서 화성시의 융릉(隆陵)_당시, 현륭원으로 천장한 것도 대표적인 천장 사례이다.
정조는 풍수지리를 직접 연구한 대표적인 왕인데, 융릉의 형세를 직접 살펴본 것은 물론, 은신군(恩信君)의 묘로 소점한 곳이 풍수적으로 매우 좋지 않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새로이 천장할 것을 명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천장은 왕실은 물론, 사대부가를 비롯하여 일반 평민들까지도 자주 실행했던 부분이다.
천장은 이장(移葬)이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왕의 경우에는 천봉(遷奉)이라고도 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전란의 와중에서 왕의 시신을 제대로 의례를 갖추어 묻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다시 또 옮겨 묻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때 잦은 개장과 파묘가 있었다는 것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드러나 있고, 그 이면에는 조상의 무덤을 훼손 하는 것이 후손에게 재앙을 초래한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사도세자 천원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사도세자 천장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있다.

정조 13년 10월 5일 정사 1789년
영여(상여)가 구원(배봉산의 영우원)으로부터 출발하다.
영여(靈轝)가 둑도(纛島)에서 출발하여 과천에 머물렀다.
석곡(夕哭)·석전(夕奠) 및 석상식(夕上食) 때가 되자 모두 의식에 따라 예를 거행하였다.

정조 13년 10월 6일 무오 1789년
영여가 과천으로부터 출발하여 수원(水原)의 신읍(新邑)에 있는 막차(幕次)에 이르러 주정전(晝停奠)을 지낸 다음, 다시 출발하여 원소의 정자각에 도착하였다.
재궁(梓宮)을 받들어 찬궁 안의 탑(榻) 위에 안치하였는데 진설(陳設)은 처음과 똑같게 하였으며 설전(設奠)은 정해진 의식대로 하였다.
석상식(夕上食)·포곡(哺哭)·석전(夕奠)을 겸하여 지냈다.

정조대왕의 대가(大駕)가 과천현(果川縣)에서 주정(晝停)하고 사근현(沙斤峴)을 넘어 경진년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 주정을 하였던 옛 터를 찾았다.
주민들 가운데 그때에 행차를 구경했던 사람들에게는 쌀을 지급하도록 경기 관찰사에게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경모궁(景慕宮)의 행차가 이곳을 지날 때 예교(睿敎)하시기를 ‘대가(大駕)의 주정소(晝停所)가 저쪽 언덕에 있으니, 어떻게 나의 주정소를 다시 설치할 수 있겠는가.’ 하시고는, 이곳에다 옮겨 설치하도록 하셨다.
이 일은 내가 직접 들은 것인데 이제 이곳에 왔으니 나의 심회를 억제하기 어렵구나. 이후로는 지방관으로 하여금 대충 수리를 하도록 하라." 하였다.
저녁에 수원부(水原府)에 머물렀다.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1789년
정조대왕의 행차가 새 원소에 나아갔다.
재실에 들어가 시복(緦服)을 갖춰 입고 정자각까지 걸어가서 재궁을 살펴본 다음, 곡하는 자리에 가서 곡을 하였다.
이어 아침 상식을 절차대로 올리고 수도각(隧道閣)에 나아가 광(壙) 안의 흙 빛깔과 사방 산의 국세(局勢)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총호사 채제공이 아뢰기를, "오늘 아침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으나 유독 수도각 안에만은 한 점의 안개 기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아침과 썰렁한 밤의 바람 기운이 매섭고 싸늘한 시각에도, 이 각에 들어서면 따뜻하기가 온돌방과 같으니, 상서로운 광채가 모여들고 길한 기운이 스며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걸어서 주산(主山)의 봉우리에 올랐다가 보여(步轝)를 타고 산등성이를 빙 돌아나와 후탁(後托)의 머리를 들이민 지점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 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만큼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자각으로 돌아와서 주다례(晝茶禮)를 친히 거행하였다.

재궁에다 '상(上)'자를 썼다.
【서사관(書寫官)은 박명원(朴明源)이었다.】

용주사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륭원 옆에 세운 경기도 화성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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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용주사(龍珠寺)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화산에 있다.
856년(신라 문성왕 18) 길양사(葛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952년(고려 광종 3)에 불에 타버렸다.
그 후 조선후기에 이르러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갈양사 터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였다.
건립 비용은 관료와 백성들의 시주를 받아 충당하였다.
창건 이후 용주사는 왕실의 비호 하에 당시 불교계의 승풍(僧風)을 선도하는 중요 사찰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신라시대에 창건된 용주사는 고려시대 들어 952년에 소실되었다.
그러나 고려전기의 고승이자 국사(國師)였던 혜거(惠居)가 970년 이 절에 온 뒤 "물이 맑고 산이 아름다워 만대에 복된 터가 될 것"이라며 왕실에 절의 중건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971년(고려 광종 22) 갈양사를 중건한 뒤, 승방 혜거헌(惠居軒)을 차리고 머물다가 이 절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혜거는 이 절이 산수가 수려하여 국가 만대의 복된 터전이니, 신에게 제사를 지내 복이 내리는 도량이 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에 광종은 금과 함께 조 500석, 면포 60필, 전결 500석을 내려 불상과 탑과 전당과 누각을 모으고 수리하니, 그 모습이 장대하고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 이듬해에는 용주사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齋)를 국가적 불교 행사로 개최하기도 하였다.
952년(고려 광종 3)에 큰 불이 나서 전소되었다.

변천

길양사는 조선후기까지 폐사지로 남아 있었으나 정조대에 왕실원당으로 중건되었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고 이듬해 명복을 비는 용주사를 그 곁에 창건하였다.

조정에서는 용주사의 건립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공명첩 250장을 발급했으며, 대규모로 관료와 백성들의 시주를 받아 비용에 보태었다.
용주사 창건에는 당대의 주요 관료들이 상당수 동원되었다.
당시 시주자이자 참여자 명단이기도 한 「대시주진신안(大施主縉紳案)」에 의하면 경기감사서유방 등 각 도의 감사 9명, 군수, 현감, 부사, 만호, 첨사 등 지방 관료 87명을 더하여 모두 96명에 달하는 관료의 관직명과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팔로읍진여경각궁조전시주록(八路邑鎭與京各宮曹廛施主錄)」에는 각 궁과 중앙 관청 그리고 지방 감영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다.
결국 전국에서 거둔 시주금은 총 86,505냥 1전이었다.
그리고 전국의 백성과 사찰에서도 13,779냥 9전의 시주를 걷었다.
이 가운데 57,388냥 8전은 건축비로 썼고, 28,116냥 3전은 절에서 소유할 전답 매입비로, 2,000냥은 화주승들의 여비로 충당하였다.
용주사는 3년여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절에 불상을 조성한 후에는 당대의 고승이었던 인악의첨(仁岳義沾)에게 불복장발원문(佛腹藏發願文)을 짓도록 명하였다.
당시 인악은 불상을 증명하는 소임을 맡아 불상에 들어갈 발원문을 지었는데 정조가 이를 보고 문장이 유려하고 뜻이 시원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상을 내렸다.
정조 자신은 「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호)를 직접 짓고 써서 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명복을 빌었다.
정조는 이 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삼가 게어(偈語)를 지음으로써 보은의 불공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 글은 현재 용주사에 보관되어 있다.

정조는 또한 부모 은혜의 크고 깊음을 가르치는 불교 경전인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세 판본을 판각하여 이 절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용주사를 창건하기 전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승려 보경(寶鏡)이 바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용주사 창건에 이르러 보경을 용주사의 총공사 및 시주금 수납을 책임지는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 및 용주사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았다.
그리고 절이 완공된 후에는 『부모은중경』을 판각하여 이 절에 소장하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金弘道)에게 불전(佛殿)의 탱화를 그리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용주사에 남아 있다.

한편 용주사는 창건 당시부터 불교계를 관리했던 5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한 곳이 되었다.
당시 5규정소는 광주 봉은사, 양주 봉선사, 남한산성 개운사, 북한산성 중흥사, 수원 용주사였다.
규정소란 곧 율사(律寺)로 승려의 과실을 규찰하고 바로잡는 곳이다.
자장율사가 통도사(通度寺)에 있으면서 승려를 통치한 것처럼 승려와 관련된 일체를 규제하였다.
모든 승려의 우두머리로 순사(巡使)를 파견하여 지방의 사찰을 두루 점검하고 승려의 과실에 관한 일을 바로잡았던 것이다.
당시 불교 종단에 관련한 일들은 다섯 규정소의 책임자가 도회소에 합석하여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