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제 이야기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어진(왕의 초상화)은 1989년 이길범 화백의 그림이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의 그림들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문헌의 기록을 통해 200년이 지난 뒤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서 정조는 단정한 비단옷을 입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학자군주'다운 모습.
그런데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제는 소실된 3점의 어진 속에서 정조는 늘 군복을 입은 상태였다고 쓰여 있다.
'무인군주'로서 강인함을 강조하려 했다는 문장과 함께 말이다.
과연 정조는 또 어떤 매력을 지닌 왕이었을까?
조선의 수많은 왕들의 기록의 기록을 보면, 활쏘기 성적이 적혀 있는 기록들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태조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늘 활쏘기를 즐겼고 또 궁궐 안팎으로 궁술대회가 자주 열릴 수 있게 장려 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에 관한 기록에는 그가 누구보다 활쏘기 훈련을 자주했고 또 실력도 뛰어났다는 내용이 많다.
"문장은 아름답게 꾸미면서 활을 쏠 줄 모르는 것은 문무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 그는 말했다.
학문을 습득하는 것만큼이나 무예를 중요하게 여겼던 그는 자신이 직접 선별하고 훈련에 참여해 만든 특수부대 '장용영' 뿐 아니라, 국가의 행정과 문장을 담당하는 규장각 관리들에게까지 활쏘기를 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활이 망가지고 깍지는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은 부르트고 솜씨가 서툴러서 크게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여유당전서에 쓰여진 정약용의 기록이다.
'어사고풍첩'은 정조의 활쏘기 성적을 기록해 놓은 책인데, 1792년 한 해 동안의 기록이 특히 놀랍다고 알려져 있다.
한번에 50발을 쏴서 49발을 맞춘 날이 연속해서 열흘이나 되고 100발을 쏴서 98발을 맞춘 날도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50발을 매일 같이 맞추던 시절이 이어졌는데, 성적이 계속 좋게 나오자 정조는 과녁을 축소하여 더욱 정밀한 활쏘기를 시도했다.
점점 작아지던 과녁은 말미에는 작은 부채나 곤봉, 편곤 등으로 대체 되었는데, 부채의 경우엔 5발중 4발을 곤봉은 10발 중 10발 모두를 적중 시켰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50이나 100이라는 만발의 숫자보다 정조에게는 한발 모자란 49발이라는 숫자가 따라 붙는다.
그건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신하들 앞에서 활쏘기를 즐겼던 그는 49발의 명중보다 한 발의 쏘지 않은 화살로 이야기 하는 왕이었다.
"임금은 신하에게 겸양의 미덕을 보여줘야 하는 게 '예'다." 정조에게 활은 누군가를 쏘아 죽이는 무기일 뿐 아니라 복잡한 시대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멀리 날아가 정확히 꽂히는 뾰족한 열쇠였다.